비록 불행한 병을 앓는다 하더라도 저들에게도 온갖 인간적인 소망과 자기 생의 실현욕은
근본적으로 여느 인간들과 다를 바가 없을 것입니다.
기구한 생의 역정을 걸어온 사람들이라 하더라도
저들이 기구해온 천국이 여느 세상 사람들의 그것과 다를 수는 없습니다.
■ 이청준(지은이)의 말
이 책의 이야기들은 많은 부분을 실재의 섬 소록도와 소록도의 일에 관계된 분들에게 취재하였다. 그러나 『당신들의 천국』은 물론 한 편의 소설 작품이며, 소설 속의 이야기들 역시 과거나 현재를 막론하고 섬의 실제와는 일치하지 않는다. 그것은 소설 자체의 법칙과 질서에 따라 이야기가 독립적으로 발전한 것이며, 그런 점에서 이 소설의 이야기와 섬의 실제는 전혀 별개의 것이라는 점을 분명히 밝혀둔다. 인명이나 지명·사건 들이 더러는 사실과 유사하게 그려지고 있는 대목도 있으나, 그 역시 소설의 의도에 알맞게 첨삭·변경·재구성된 소설 속의 일부분일 뿐 섬의 실제와는 상관이 없는 것들이다.
나는 지금도 소록도와 소록도 사람들을 위해 성자적인 노력을 바치고 있는 분들의 값진 기여를 알고 있으며, 아직도 그곳에서 불굴의 투병 생활을 계속하고 있는 수많은 원생들의 처지를 알고 있다. 나는 나의 이번 소설이 섬을 위한 그분들의 높은 뜻과 노력에 그리고 원생들의 줄기찬 투병 생활에 어떤 위로와 보탬이 되지 못할망정 행여 다른 바람직스럽지 못한 누를 끼치게 되지나 않을지가 심히 두렵다. 소설의 이야기와 섬의 실제는 매우 다른 것이라는 그 지극히도 당연한 창작 논리를 여기서 굳이 되풀이하고 있는 것은 그 점을 스스로 경계하기 위해서이다.
_출처: 알라딘인터넷서점
"울타리가 둘러쳐진 천국이 진짜 천국일 수는 없습니다. 그리고 문둥이를 위한 문둥이만의 천국을 꾸미시려는 원장님의 의지 바로 그것 속에 이미 그 보이지 않는 철조망은 마련되고 있습니다."
소록도 나환자 병원에 조백헌 대령이 새로운 병원장으로 부임해 오면서 이야기가 시작된다. 그는 정의로운 인간형으로 소록도를 나환자들의 천국으로 만들 것을 주민들에게 약속한다. 그러나 이전 원장이 어떤 방식으로 소록도를 자신만의 천국으로 만들어갔는지 기억하는 주민들을 설득하기란 쉽지 않다.
국어사전에 '천국'은 '어떤 제약도 받지 아니하는 자유롭고 편안한 곳. 또는 그런 상황.'을 일컫는다고 나와 있다. '천국'이 어떤 곳이냐고 물으면 대답하는 이에 따라 각기 다르게 답할 것이다. 내가 처한 어려움이 해결되는 곳, 그곳이 바로 천국이다. 결국 '천국'은 타인의 잣대로 만들 수 없음을 의미한다.
"원장님께서 이 섬을 그냥 누구나 살기 좋은 사람의 천국이 아니라, 쫓기고 학대받아온 문둥이들을 위한, 그 문둥이들만의 천국으로 만들고 싶어 하신 바로 그 점이 또한 그 천국의 철조망이 아닐 수 없습니다."
소록도 주민들과 자신을 분리시켰을 때 '우리들의 천국'이 아닌 '당신들의 천국'이 시작된다. '타자의 시선'으로 섬 주민의 생각을 재단하게 되는 것이다. 함께하는 공동체의 일원이 아닌 도움을 주어야 하는 대상으로 보았을 천국은 사라지고 지옥이 찾아온다.
"문제는 오히려 그 명분의 지나친 완벽성. 명분이 너무도 훌륭했기 때문에 아무도 그 명분엔 입을 열어 말을 할 수 없었던 명분의 독점성이었다. 게다가 명분이라는 건 언제나 힘 있는 자의 차지였다. 주정수는 최고 최선의 명분을 그 혼자 독차지해버리고 있었다. 그 주정수의 명분 앞에 다른 사람들은 아무도 자신을 주장할 자신의 명분을 지닐 수가 없었다."
견제되지 않는 권력은 부패할 수밖에 없다. 스스로가 부여한 정당성은 권력행사의 위험한 무기가 된다. 누구나 자신만의 '동상'을 가슴속에 품고 있으나 그것을 품고 있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동상'을 짓는 방법이 문제라고 작가는 말한다.
권력자들은 상황을 인식하고 그것에 대처할 때 '나의 명분'으로 행동을 합리화한다. 개인의 욕심을 '대의'로 대체하기도 한다. 그래서 권력은 견제되어야 한다.
한센병 환자들의 섬, 소록도에서 병원장은 최고 권력자이다. 원장은 제왕이고, 섬은 그의 왕국이다. 평의회에서도 원장을 교체할 수는 없다.
선출할 권리와 폐할 권리를 함께 갖지 못한다면 견제의 충분조건을 갖추지 못한 것이다.
"저흰 늘 저 아이들에게 나병은 유전이 아니라고 가르칩니다. 그리고 어떤 다른 병보다도 이 병은 전염성이 약하므로 너희들은 다른 건강한 아이들과 아무것도 다를 데가 없는 떳떳한 어린이라고 말해 줍니다. 하지만 보십시오. 저 아이들은 직원들 자녀들이 다니는 고개 너머 국민학교로는 등교를 못 합니다. 뿐입니까. 이 보육소의 분교에서마저도 건강한 선생을 수업을 맡아주러 오시는 분이 없습니다. 보육소의 미감아 교실 선생님은 거의 모두가 음성 병력자들 뿐입니다."
공원을 만들고 환경을 조성하여 아무리 보기 좋게 만들더라도 분리와 배제가 내포되어 있다면, 그곳은 탈출하고픈 지옥일 뿐이다. '철조망' 밖으로 자유롭게 이동할 수 없고, 모두가 자연스럽게 섞여 생활할 수 없는 공간이라면 그곳이 아무리 번듯하게 꾸며졌다 해도 탈출하고픈 지옥에 불과하다. 그렇기에 섬사람들과 운명을 같이 하지 못한다면 조원장이 꿈꾸는 낙원은 섬사람들에게는 낙원이 될 수 없다. 밖에서 안을 들여다보는 것이 아니라, 함께 섞여 운명공동체로서 살아가야 비로소 우리들의 천국을 만들 수 있게 된다.
누군가를 구분하고 배제하지 않았는지 돌아봐야겠다. 그리고 내 마음의 철조망을 걷어내야겠다.
재산이나 건강은 그것이 극도로 결핍된 처지에서나 어떤 특수한 천국의 내용이 될 수 있을 뿐, 그것들이 언제 어디서나 모든 인간의 궁극적인 천국의 내용일 수는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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