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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mall Cinema

[영화] 봉오동 전투 The Battle: Roar to Victory,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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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무는 단 하나! 달리고 달려, 일본군을 죽음의 골짜기로 유인하라!


출처:다음 영화

 

임무는 단 하나! 달리고 달려, 일본군을 죽음의 골짜기로 유인하라!

영화 <봉오동 전투>는 독립군 연합부대가 일본 정규군을 상대로 첫 대규모 승리를 쟁취한 1920년 6월 봉오동 전투를 처음으로 영화화한 작품이다. 원신연 감독은 한 명의 영웅이 아닌 모두가 함께 일궈낸 첫 승리의 역사, 봉오동 전투에 단번에 매료되었다고 전했다. “가슴으로 받아들이기 전 몸이 먼저 반응했다. 시나리오를 읽어 내려가는 내내 소름이 돋고, 두 주먹이 불끈 쥐어지고, ‘일어났다 앉았다’를 몇 번이나 반복했다. 내가 마치 그 시대 독립군이 된 기분이었다.”라고 <봉오동 전투>를 처음 마주했던 뜨거운 순간을 회고했다. 당시 봉오동에는 밟고 살 땅, 농사지을 땅, 죽어서 묻힐 땅을 찾겠다고 몰려든 전국의 이름 모를 독립군들로 가득했다. 그동안 독립을 위해 목숨 바친 영웅들의 이야기는 많았지만 이름 없는 영웅들을 들여다본 이야기는 많지 않았다. <봉오동 전투>는 어제 농사짓던 인물이 오늘 독립군이 되어 이름 모를 영웅으로 살아간 시간과 그들의 승리에 관한 영화이다. 기억되지 못했고, 한 줄의 기록조차 남겨지지 않았던 이들이 뜨겁게 저항해 쟁취한 승리가 바로 봉오동 전투이다. 원신연 감독은 “지금까지 영화들이 대부분 피해의 역사, 지배의 역사, 굴욕의 역사에 대해 다뤘다. 하지만 일제 강점기는 절망으로 점철된 시기가 아니라 희망과 용기로 이야기할 수 있는 시대다. 외면하고 싶은 아픈 역사가 아니라 기억해야 할 저항의 역사다”라며 일제 강점기를 새로운 시각으로 기록하고 싶은 열망을 전했다. 전국 각지에서 모여 하나의 뜻 아래 목숨을 걸고 맞서 싸웠던 독립군들의 이야기, 그들의 첫 승전보가 우리와 함께 한다. _ <출처 : 다음 영화>

 

1910년 조선은 일본의 식민지가 된다.
1919년 3월 1일, 비폭력 '만세운동'이 일어나고, 일본은 이들을 무자비하게 총칼로 진압한다.
이는 항일 무장투쟁에 불을 붙였으며, 일본은 백전무패의 '월강추격대'를 편성해 무장 독립군의 근거지인 봉오동 일대 섬멸을 명한다.
이에, 출신도 계층도 달랐던 무명의 독립군들이 목숨을 건 봉오동 유인작전을 시작한다.

 

"어떤 죽음은 태산보다 무겁고, 어떤 죽음은 깃털보다 가볍다. "

 

 “人固有一死, 或重于泰山, 或輕于鴻毛, 用之所趨異也.”
(인고유일사, 혹중우태산, 혹경우홍모, 용지소추이야)
“사람은 누구나 한 번 죽지만, 어떤 죽음은 태산보다 무겁고, 어떤 죽음은 깃털보다 가볍다.
이는 죽음을 쓰는 방향이 달라서다.”

 

사마천의 '사기'에 나오는 말이다. 기원전 98년 한(漢)나라 무제 때 흉노 정벌과 관련하여 황제를 비난했다는 이유로 사마천은 사형당할 처지에 놓인다. 이때 사형을 면할 두 가지 방법이 있었는데 하나는 보석금 50만전을 내는 것이었다. 그러나 가난한 사마천은 돈을 마련할 능력이 없었다. 사형을 면할 또 다른 방법은 남성을 거세하는 궁형을 받는 것이었다. 살아남아 오랫동안 구상해온 '사기'를 완성하고 싶었던 사마천은 목숨을 유지하기로 결심하고 궁형을 선택하게 된다. 궁형을 선고받으면 사형을 자청할 정도로 치욕스러운 형벌이었으므로 사대부로서 이를 당하면 자결하는 것이 상례였다. 그러나 사마천은 사는 길을 택했다.

"내가 죽는다고 해도 세상에서는 절개를 위해 죽은 자라고 하지 않을 것이며, 특히 슬기가 다하고 죄가 극에 달해서 면할 수 없기에 스스로 죽음으로 나아갔을 뿐이라고 여길 것이다. 왜냐하면 평소에 내가 세운 것들이 그렇게 만든 것이다. 사람은 진실로 한 번 죽지만 어떤 죽음은 태산보다 무겁고, 어떤 죽음은 깃털보다 가벼우니 이는 그 추구하는 바에 따라 쓰인 것이 다르기 때문이다."

독립군 해철(유해진)이 들고 다니는 칼에는  '或重于泰山, 或輕于鴻毛'이라는  글귀가 새겨져 있다. 태어난 곳도, 생업도 달랐지만 조국의 독립을 위해 목숨을 바쳤던 독립군의 마음이 담겨 있는 글귀가 아닐까 싶다.

살아 있어도 산 목숨이 아니었다. 일본이 행했던 만행을 떠올리면 도저히 일본을 좋아할 수 없다.  '우리에겐 반일감정이 유전자에 각인되어 있는 것 같다'라고 말하던 지인도 있었다. 처음부터 독립군이 아니었다. 농사지을 땅을 빼앗겨서, 처참하게 죽어가는 가족들을 지켜보면서, 부끄럽지 않은 삶을 살고자 선택한 길이다. 

 

"전국의 독립군 수는 알 수가 없어. 왜인 줄 아네? 어제 농사짓던 인물이 오늘은 독립군이 될 수 있다 이 말이야. 나라를 뺏긴 설움이 우리를 복받치게 만들고 잡아 일으켜서 괭이 던지고 소총 잡게 만들었다. 이 말이야." 

 

겡게, 궁감자, 지실... 감자를 일컫는 말이 제각각이듯 전국 곳곳에서 모였다. 뱃사공, 남사당패, 농부, 마적... 처음부터 군인이 아니었다. 

일본군들은 동생과 함께 길안내를 하던 해철에게 길안내 대가를 주기는커녕 오히려 폭탄으로 형제를 죽이려 했다. 그 폭탄 때문에 동생의 죽음을 맞이하게 된 해철은 얼굴 상처와 함께 독립운동의 길을 걷는다. 

"잊지 말고 엄마가 한 말 항상 기억해. 절대 부끄럽게 살면 안 돼." 누이에게 어머니 말을 전해 들은 장하(류준열)는 어머니의 말씀대로  부끄럽지 않은 삶을 선택한다. 

온 마을이 일본군에 의해 초토화되는 과정을 목격한 '춘(春)'이는 동생의 주검 앞에서 목놓아 울며 이름처럼 빼앗긴 땅에 '봄'을  가져오고자 독립군에 합류한다. 

 

"너희들이 어찌 죗값을 치르는지 꼭 살아서 지켜봐.
돌아가서 단 한 사람이라도 네 말을 들어주는 사람이 있다면 네가 본 걸 꼭 그대로 말해줘." 


"우수한 인재들을 많이 배출하는 동경제일 고등학교에 다녔다고 하던데 그곳을 그만두면서까지 왜 군에 지원했나?"
"제국의 총과 칼이 어떻게 쓰이는지 보고 싶었습니다."
"그렇구나. 대동아 정복에 앞장선 부친을 닮아서 매우 기특하구나. 그래 직접 보니 어떻던?"
"부끄러웠습니다. 일본인이 하는 짓이 부끄럽다고 느꼈습니다."

 

일본은 그들이 저지른 죄를 역사 앞에 무릎 끓고 사죄해야 한다. 그리고 같은 죄를 범하지 않도록 제도적 조치를 취해야 한다.  

평범한 가장 아이히만이 유대인 학살이라는 반인륜적 범죄를 저지른 것을 보고 한나 아렌트는 '악의 평범성'을 이야기했다. 조직의 명령에 따르기만 했다고 해서 저지른 악행이 면죄부를 받을 수 없다. 일본이 행한 범죄에는 무형의 국가와 그 속에 실재한 개인이 존재했다. 

 


 

■ 봉오동 전투

봉오동은 두만강에서 만주 쪽으로 40리 정도 들어간 곳에 있는 계곡 지대다. 홍범도와 최진동이 이끄는 독립군 연합부대는 1920년 6월 7일 여기서 매복 작전을 펼쳐 일본 157명을 사살하고 200여 명의 부상자를 내는 대승을 거두었다.
그 발단은 독립군 부대가 6월 6일 함경북도 종성군 강양동의 일본군 헌병초소를 습격한 것이었다. 일본군이 1개 중대를 출동시켜 반격전을 편 데 이어 보병과 기관총대 1개 대대를 동원하자 안산과 고려령에서 기습해 유인한 뒤 타격을 가했다.

이 전투는 그 해 10월에 있은 청산리 대첩에 다소 가려진 면이 있지만 일본 정규군을 상대로 한 최초의 대승으로 독립군의 사기를 크게 올렸다는 점에서 주목할 가치가 있다. 오죽 기뻤으면 임시정부 기관지인 〈독립신문〉이 공보 호외를 발행했을까.  

한편 이에 자극받은 일본군은 중국 마적을 매수해 일본 영사관과 일본인들을 습격하도록 해 이른바 ‘훈춘 사건’을 일으킨 뒤 이를 빌미로 중국 당국과의 교섭도 없이 군대를 만주에 진주시켜 독립군 토벌에 나섰다.

_ 출처 : 1면으로 보는 한국 근현대사, 김성희, 서해문집

 

나라가 불운에 처해있는데 백성의 한 사람으로 어찌 먹고사는 일상에만 안주할 수 있겠는가

 

봉오동 전투와 청산리 대첩을 이끌었던 독립전쟁의 영웅 홍범도 장군이 고국 땅에서 영면했다.

광복절 카자흐스탄에서 봉환된 홍범도 장군의 유해가 18일 오전 10시 30분 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제3묘역에 안장됐다.

홍범도 장군이 별세한 지 78년 만이다. [출처] 대한민국 정책브리핑(www.korea.kr)

 

홍범도 장군 / 사진 출처 : 나무위키

 

글로벌 시대에 '조국'이란 표현이 어색할 수 있다.

국경을 초월하여 자본이 넘나들고, 사람들의 이동이 자유로운 세계화 시대에 과거 역사이야기가 구태의연한 문제라 여겨질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한다. 빼앗긴 땅에서  우리 조상들이 어떻게 삶을 견디어 왔는지.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이 땅에 뿌려진 피의 흔적을. 조국을 지켜 낸 무명의 영웅들을.

그리고 이 땅을 적신 항일독립군들의 선혈이 우리에게 무엇을 이야기하고 있는지 되새겨 보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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